책임지는 지도자를 보고 싶다

북핵 호도하고도 변명 급급

강규형 칼럼 | 최종편집 2017.09.08 11: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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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규형 교수의 2006년 12월 15일자 동아일보 칼럼은 지금 당장 자구 수정 하나 없이 그대로 실려도 될 만큼 현재의 북핵 위기를 잘 표현해내고 있다. 그것은 그동안 이 심각한 문제가 얼마나 방치됐는지, 그리고 이런 위기를 초래한 사람들의 무책임성이 컸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1년 전 그 때 칼럼을 그대로 자구수정 하나 없이 게재한다.

이 글에서 ‘북한은 핵을 개발한 적도 없고, 의도도 없고, 능력도 없다’, ‘대북 지원금이 핵개발로 전용된다는 얘기는 터무니없다’고 호도했던 사람들은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을 포함 무모한 햇볕정책을 추진한 사람들이고, 현 문재인 정권의 외교안보 멘토 역할을 수행하는 다수의 사람들이다.

“북한 노동당기와 김일성 초상화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죄목에 대해 안기부의 조작이라고 거짓 증언과 변명을 했던 사람은 1992년 검거된 ‘남한 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으로 복역했던 이철우 전 열리우리당 의원이다. 경기 포천·연천. 자유한국당 이철우 의원(경북 김천)과는 다른 동명이인이다. 예천국제공항을 추진한 주역은 신군부의 실세로서 안기부장 국회국방위원장을 지낸 제5공화국의 권력자로 자기 지역구에 무리하게 국제공항을 추진한 유학성 전 의원이다. 예천공항은 요즘도 “유학성 공항”이란 ‘애칭’으로 불린다.

이러한 지도자들의 무책임성은 한국사회를 좀먹는 큰 요인이다. 현재의 북핵위기를 초래한 것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뻔뻔하게 변명하고 각 매체에 얼굴을 드미는 사람들을 보면 새삼 한국은 지적 진실성을 결여한 사회라는 확신이 든다.

 

[동아광장/강규형] 책임지는 지도자를 보고 싶다

2006년 12월 15일 동아일보

이시구로 가즈오의 원작소설을 제임스 아이보리가 감독한 ‘남아 있는 나날(Remains of the Day)’은 인상적인 장면으로 가득 찬 명화다. 영화에서 영국의 정치가 달링턴 경은 시종일관 대(對)나치독일 유화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끊임없는 양보를 주도하지만 바로 그 정책 오류 때문에 몰락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실존 인물인 체임벌린 총리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유화정책은 처절한 파산을 맞았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자신의 정책이 실패했음을 깨닫는 순간 정책적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보였다.

“나는 피와 노력과 눈물과 땀 이외에 아무것도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여러분은 물어볼 것입니다. 나는 단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승리’.” 처칠의 전시내각 총리 취임 연설이다. 대학 시절 서양사를 처음 배울 때 감동적으로 다가온 내용이다.

그 못지않게 감동적인 것은 처칠의 전임자인 체임벌린의 잘 알려지지 않은 개전(開戰) 연설이었다. 그는 의회에서 침통하게 선언했다. “우리는 이제 독일과 교전상태에 들어갔습니다…오늘은 우리 모두에게 슬픈 날입니다만, 저 이상으로 슬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히틀러를 위해 노력한 모든 것, 내가 희망한 모든 것, 나의 공적 생애를 통해 믿어 왔던 모든 것은 깨어지고 부서졌습니다.” 연설은 일말의 비장미까지 풍긴다.

북핵 호도하고도 변명 급급

우리의 지도층은 이런 책임의식을 보인 경우가 역사상 드물다. 매우 많은 예가 있지만 두 가지만 들어 보자.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를 외치다가 점심은 수원에서 저녁은 대전에서 먹게 될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 수뇌부는 ‘우리 군은 해주를 점령하고 북진 중’ ‘의정부 이북을 제압하고 있다’ 또는 ‘3일, 늦어도 5일 이내에 평양을 향하여 북진할 결의이다’라는 얘기만 남기고 서울을 몰래 포기했다. 수많은 시민을 버려두고 한강다리마저 끊어 놓았다. 여기에 대해 일언반구 회한의 말조차 남기지 않고 애꿎은 공병감만 사형에 처했다.

선심성 공약으로 추진돼 1989년 개통되고 2002년 증축된 예천공항은 이제 완전히 폐쇄됐다. 거기에 쓴 혈세가 천문학적 숫자이다. 건설교통부 관계자는 “잘못된 정책 판단과 정치권 인기 전략이 맞물린 예산 낭비의 전형”이라고 혀를 찼지만 책임졌다는 사람을 보기는커녕 사과 한마디 들은 적이 없다.

북핵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다. 이 사태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북한은 핵을 개발한 적도 없고, 의도도 없고, 능력도 없다’, ‘대북 지원금이 핵개발로 전용된다는 얘기는 터무니없다’고 호도했던 사람들은 지금 아무 말이 없다. 오히려 교언(巧言)으로 이런 사실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자기합리화가 인간의 근본적인 방어기제라고는 하지만 온 힘을 다해 책임 회피와 책임 전가를 하는 행태는 도가 지나치다. “북한 노동당기와 김일성 초상화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지적에 대해 공안 당국(안기부)의 조작이라고, 며칠 후에 곧 밝혀질 거짓 변명을 했던 사례는 또 어떤가. 문제는 그런 것을 과거에 소지했거나 그런 생각을 과거에 믿었다는 점이 아니다. ‘이제는 아니다’ 또는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솔직히 고백하면 될 일을 비본질적인 변명으로 무마하기에 바쁜 모습은 공인의 자세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솔직한 용기 보일 때 신뢰받아

언론이라고 다를까? 온라인 신문이건 일부 종이신문이건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와 허위사실 유포를 하는 경우가 있지만, 오보임이 밝혀져도 사과 한마디 안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터넷 공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댓글 공간은 완전한 무정부 상태이고 무책임한 정신병자의 놀이터가 된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책임지지 않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는 우리 사회의 행태는 대한민국이 진정하게 신뢰받는 사회로 나아가는 데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해야 한다. 체임벌린은 정치가로서, 지도자로서 실패했다. 그러나 솔직함과 책임지는 자세 때문에 아무도 그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그와 같은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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