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라를 강대국으로… 이회창 회고록과 政治

文정부 100일 즈음 출간된 치열한 정치 뒷이야기, 3金 정치 청산과 노무현 그리고 박근혜

안종현 기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7.10.02 09: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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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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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데일리 정치부장 안종현입니다. 사회부에서 서울.인천.경기 시.도청을 출입하며 오세훈-김문수 등 대권 주자들을 전담 마크했습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출입기자를 했습니다.


총 1,039페이지. 문재인 정권 출범 100일 즈음 출간된 이 책은 대법관, 중앙선관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 그리고 2번의 유력한 대권 후보로 나섰던 이회창 전 총재의 인생을 망라하고 있다.

꽤 두껍지만, 열거한 수많은 이력을 한번에 다 담아내기 힘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전 총재 스스로 하나하나 써내려간 책인 만큼 그의 인생관부터 법관에서 정치인으로 걸었던 순간순간마다 가졌던 자부심과 아쉬움이 세세히 담겨 있다.

3김(金) 시대를 깨고 나온 경사(徑史, 이회창 전 총재의 호)의 회고록은 1부 '나의 삶, 나의 신념', 2부 '정치인의 길'로 구성돼 있다.

1부는 두 번 대법관에 임명될 정도로 존경 받았던 법관으로서의 삶, 중앙선관위원장과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지내면서 겪었던 인생이 녹아 있다.

2부는 총리 관저를 나온 1994년 여름 시점부터 시작된다. 정당을 이끌고 대선을 치르며 치열한 정쟁(政爭)의 한복판에서 가졌던 소회(所懷)를 풀어나간다.

"정치에 들어온 이상, 정권을 잡고 대통령이 되어 이 나라를 버젓한 선진국으로 끌어올리고 싶었다."

본문 중 나오는 이 말처럼 이 책은 '아쉬움'이 전반적 관점을 이루고 있다. DJ 정권 시절 힘겨웠던 야당 생활, 기치로 내세운 3金시대 청산 그리고 무엇보다 실패로 돌아간 2번의 대권도전까지.

"나는 정치의 목적을 위해 얼마만큼 노력했던가 하고 스스로 묻는다면 많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허망한 느낌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쉬움에 비해 '후회'의 감정은 잘 찾아보기 어렵다. 1997년 신한국당 대선 후보 수락연설에서 내놓은 그의 '강대국'에 대한 집념은 2017년 현재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YS-DJ와의 승부, 3金 청산을 외치다

이 전 총재가 김영삼 전 대통령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건 1993년 12월 26대 국무총리를 시작하면서다. 그래서인지 그는 1996년 신한국당 입당을 하며 정치판에 뛰어든 것을 두고 'YS에 대한 부채감'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의 정치 인생을 관통하는 정신과 관념은 '3金 정치 청산'이었다.

그는 감사원장 시절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국회개원 축하 리셉션 장면을 회고하며,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수직적 행태에 젖어있는 정치권 문화를 비판한다.

"입법, 사법, 행정 3부와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참석해 테이블마다 서서 담소하는 자리에서,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는 한 무리의 당 인사들을 거느리고 장내를 돌고, 곧이어 김종필 당시 자민련 총재도 나타나 당 인사들과 함께 똑같이 서로 위세를 과시하듯 돌았다."

그는 이를 보고 3김 정치의 속살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론은 3김 씨를 두고 '카리스마'라고 평가했지만, 권위주의와 카리스마 또는 통솔력은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 이 전 총재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권위주의와 지역주의에 젖은 3김 정치의 청산은 자신이 나선 1997년 대선 후보 경선이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한나라당을 창당하고 총재가 된 이후 당내 파벌 체제를 혁파하고, 민주당에서도 주류가 아닌 노무현 고문이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 3金식 정당운영 행태는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고 썼다.

하지만 그의 정치 인생에도 굴곡은 많았다.

또 15대 대선을 앞두고 치른 1996년 15대 국회의원 총선. 이 전 총재에게는 사실상 정치 데뷔 무대였다. 선대위의장으로 뛴 이 선거에서 그는 기대 만큼의 성과를 얻진 못했다.

기존 의석 169석에 한참 못 미치는 139석을 얻는데 그쳤고, 김종필 전 총리의 자민련이 50석을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전통 지지층인 대구에서 강재섭 단 한명만 당선된 점은 뼈아팠다.

불길한 조짐의 시작이었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레임덕'을 우려해 내놓은 조기대선 분위기 자제 움직임은 그의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김대중으로 사실상 낙점된 야당에 비해 여당은 대통령 YS의 눈치를 보느라 패배를 자초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YS가 이회창을 겨냥해 '독불장군론'을 내놓자 곧바로 반격에 나선 것이 '국민정당론'이었다. 하지만 이 프레임 싸움은 이후 이인제 후보의 경선 불복을 낳으며 악재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 전 총재는 회고록 내내 완전경선 도입을 3김 시대의 물꼬를 바꾸기 시작한 것으로 높게 평가했다.

"박근혜 대통령 임기 2년차에 새정치민주연합은 그야말로 죽을 쑤고 있었다. 그럴 즈음 야당 내에서 과거 DJ의 지도력을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김대중 씨의 지도력은 3김 시대의 소산이다. 만약 그가 다 나온다 해도 김대중 대통령도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DJ비자금 폭로와 YS 탈당 요구, 그리고 이인제의 탈당

이 전 총재는 15대 대선을 기억하며 김대중 총재의 비자금 폭로와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탈당 요구 후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고 적었다.

그는 '홀로서기를 시작한 내가 또한번 결단해야 할 시점이고 넘어야 할 고개였다'고 술회했다.

연이어 이어진 이만섭, 서석재, 한이헌 등 YS계 의원들의 탈당과 이인제의 국민신당 입당 발표는 그를 괴롭혔다.

바로 시작된 반격카드. 이 전 총재는 조순 총재의 민주당과의 연대를 통해 다시 3金 정치 청산을 외친다.

그는 이 과정을 돌이켜 '조순 총재와 나는 개인적으로 친밀하지 않았지만, 3金 정치에 대항하는 건전하고 도덕적인 세력간의 연대에 적격이었다고 했다.

한나라당 탄생의 시작이었다.

"그동안 김영삼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겪어온 인정과 인연, 애환의 감정 관계를 돌이켜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난들 왜 대통령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 것을 바라지 않았겠는가. 다만 나는 남의 마름 노릇이나 하는 정치를 원하지 않았고 대통령은 이런 내가 마땅치 않았을 뿐이다."

DJP 연합과 분투를 치른 이 전 총재는 'JP가 왜 DJ와 손을 잡았을까'란 해묵은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이회창은 김대중 보다 젊고 그 주변의 차세대 주자들도 젊다. 이회창이 임기 절반을 포기할 가능성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같은 충청 출신인 이회창과 손잡는다는 것은 자칫 자민련의 충청 기반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 전 총재는 결국 DJ와의 대선 혈투에서 1.6%p 차로 패배했다. 주변의 평가는 여권분열, 야권연대, 병역문제, IMF 외환위기 등을 꼽았지만, 그는 전형적인 사후약방문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3金 씨도 결합했다가 분열하는 등 얼마나 어지럽게 이합집산을 거듭했던가. 이인제 후보를 붙잡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탈당하기로 작심한 사람이었기에 원초적으로 포용이 불가능했다."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념과 정의를 팽개친 사람들의 야합을 막지 못한 것은 원칙과 정의의 문제이지 포용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後3金 시대와 노무현과의 대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이후 이 전 총재는 '꽃다발 대신 사정의 칼이 들어왔다'고 표현했다.

소속 의원들을 향한 동시다발적인 검찰의 압박이 이어졌고, 다시 한나라당 총재로 선출된 이 전 총재는 강경투쟁을 결심한다.

"나는 싸움을 싫어하지만, 싸울 수 밖에 없다면 온몸을 던져 싸운다. 김대중 정권이 나를 법관 출신의 백면서생쯤으로 생각했다면 크게 잘못 본 것이다."

"나는 싸울 바에는 야만(?)스럽게라도 싸워서 김대중 정권 스스로 야당 탄압이 자신들의 손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야 겠다고 결심했다."

일진일퇴의 정쟁이 이어졌지만 DJ 역시 3金 시대의 주인공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그에게는 여전히 불편한 존재였다. 이 전 총재는 퇴임한 YS에 대해 "한동안 김대중 대통령과 밀월관계를 즐기는 듯하더니 김대중 정권이 경제청문회와 사정을 강행하고 나서자 특유의 독설로 DJ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고 썼다.

2000년 16대 총선은 이 전 총재에게 또한번 다가온 시험대였다.

특히 이 전 총재가 내세운 원칙에 따른 공천과정을 험난했다. 계파 보스들이 공천에서 배제됐고, 오세훈-원희룡 등 젊은 인재들이 포함됐다. 조순, 김윤환, 이기택, 신상 등이 한나라당을 탈당해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극렬히 반발하는 일부 당무위원들에게 "공천 결정권은 총재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일갈까지 내뱉으며 원칙을 밀어붙였다.

결과는 승리였다. 한나라당 133석, 민주당 115석, 자민련 17석 순이었다.

대세론 속에서 맞은 2002년은 이 전 총재에게는 두고두고 기억나오는 해다.

이 전 총재의 당시를 회고한 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여당에서 손을 떼고 국정에 전념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그동안 내연(內燃) 상태에 있던 여당 내 권력분쟁이 터져 나왔다."

"이런 분란과 더불어 이인제, 노무현, 정동영 등 대선주자들 간의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97년 신한국당에서 나를 포함한 7룡, 8룡이 서로 경쟁하는 드라마를 연출했던 것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회고록 뒷부분에 나오는 16대 대선날의 기억은 그리 자세히 서술돼 있지 않다. 다만 이 전 총재는 투표 전날인 12월18일 노무현 후보와 단일화 했던 정몽준 후보의 지지선언 철회를 오히려 악재로 평가했다.

위기의식에 사로잡힌 노 후보의 지지자들이 인터넷 광장을 통해 열정적으로 뭉치고 호응하면서 응집력을 보여줬다고 분석했다.

"투표를 마치고 몇몇 시도당 위원장들에게 투표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전화를 했는데 이중 집에서 전화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마음이 언짢았다. 그 시간에 상황을 점검하고 독려해야 할 책임자가 한가하게 집에 들어 앉아 있다니 무언가 맥이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박근혜와의 만남 그리고 평가

"나는 박근혜 대통령과는 곡절이 많았다."

이 전 총재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기술을 이렇게 시작했다.

1997년 대선 전에 찾아와 한나라당에 입당해 정치를 하고 싶다고 한 사람이 박근혜였고, 그를 정치에 입문 시킨 사람은 이회창이었다.

"(박근혜 입당)당시 한나라당 내의 다수파라고 할 수 있는 YS 민주계에서는 반 박정희 정서가 강했다. 그러나 나는 당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내가 DJP연합에 대항하기 위해 그를 받아들인 것처럼 추측했으나 당시에는 그에게 그런 정도의 지지세가 있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이 전 총재는 박근혜와의 첫 만남에 대해서 '그다지 좋은 인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미 박정희 시대는 과거가 되었고 이제 3김 정치도 과거로 넘어가려는 시점에 과거에 매달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며 "그런 면에서 박근혜 씨도 한나라당의 외연을 넓히는 데 좋은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뒷날의 일이지만, 2002년 대선 패배 후 그가 한나라당을 맡아 천막당사로 옮겨 당의 재기를 이뤄내는 것을 보면서 그의 정치 입문을 받아들인 내 결정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박근혜와의 인연은 그리 무난하지는 않았다.

2002년 대선 당시 제왕적 총재론을 들이밀며 자신에게 반발한 박근혜 당시 부총재와 결별은 꽤 아픈 정치적 악재였다.

이 전 총재는 "박근혜 부총재가 정치를 하는 뜻은 대통령이 되는 것인데 현재와 같은 당 체제로는 그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으므로 탈당하는 것이라고 봤다"고 기억했다.

또 "이유야 어떻든지 정치를 하겠다고 한나라당을 찾아왔던 박 부총재가 당을 떠나게 된 것은 내가 부족하고 부덕한 탓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참으로 우울했다"고 했다.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후보가 된 이후 이 전 총재를 찾아와 지지를 부탁했을 때 그는 흔쾌히 응낙했다. 새누리당에 입당해 전국적인 지원유세까지 다니면서 도운 것도 이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탄핵당하고 구속된 것을 두고서는 매우 비판적으로 써내려갔다.

"자신의 소신과 고집을 관철하는 기질만큼은 긍정적인 자질이라고 봤다. 그가 좋은 보좌진과 참모진을 갖추어 폭넓게 의견을 수렴하는 소통과 화합의 정치를 한다면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국정운영 모습을 보면서 실망을 하게 되었고 기대도 접었다. 특히 집권당 원내대표인 유승민 의원에 대해 '배신의 정치' 운운하면서 공개적으로 매도하고 결국 사퇴하게 만드는 것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하야하며 비위 사실에 대한 검찰조사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응하겠다는 것도 아울러 밝혀야 했다. 그러면 국민의 마음도 누그러질 수도 있었다."


박근혜를 탄핵시킨 촛불 시민들에 대해서도 우려를 이어냈다.

"이제 광장의 촛불과 시민들은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광장에서 분출한 시민의 분노는 박 대통령의 국가운영 행태에 대한 불만과 좌절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촛불집회나 태극기집회나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가 있고, 서로 생각하는 정의가 다르겠지만 이제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선고한 이상 그것이 정의이다. 이제 여야 보수-진보 할 것 없이 탄핵의 정신적 수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 안종현 기자
  • ajh@newdaily.co.kr
  • 뉴데일리 정치부장 안종현입니다. 사회부에서 서울.인천.경기 시.도청을 출입하며 오세훈-김문수 등 대권 주자들을 전담 마크했습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출입기자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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