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가 오늘의 한국 중생에게 던지는 말

밀실행정 아닌 사회적 합의 이끌어내야

박경준 칼럼 | 최종편집 2017.12.23 11: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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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진화포럼 117차 월례토론회] 2017.12.22
한국인의 문화적 정체성의 회복 - 종교를 통한 공동체 운동 방안

 

 불교 사상에 나타난 포용적 공동체 의식

박 경 준(동국대 불교학부)

Ⅰ.
산업화가 근본원인이 된 인간성 상실, 인간성의 황폐화 현상은 4차산업혁명 시대에 직면하여 더욱 심화하여 가는 양상이다.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국가간, 계층간, 개인 간의 빈부격차는 더욱 확대되고 있으며 이기적 개인주의의 견고한 장벽은 더욱 높아만 가고 공동체의식과 연대의식의 지반은 더욱 흔들리고 있다. 지구상의 모든 국가가 겉으로는 평화와 공존을 말하지만 갈등과 긴장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세상의 한편에서는 재물과 권력을 향해 질주하는 사람들이 도덕성을 상실한 채 온갖 부정과 비리를 일삼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소비문화에 젖어 감각과 향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향락주의의 영원한 짝인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 알코올과 마약, 폭력과 자살에 호소하고 있다. 핵가족화는 더욱 가속화되어 전통적인 가족 및 친족 관계가 붕괴되고 있고, 성과급 제도 등의 경쟁 시스템 확산으로 직장 안에서의 동료애도 추락하고 있다. 나아가 스승과 제자, 친구와 친구, 지역 주민들 사이의 인간관계도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이분법적 사고와 흑백논리가 확산되면서 갈등구조가 강화되고 정치적·지역적 편 가르기로 인한 국론 분열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필자는 이와 같은 총체적 갈등과 분열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불교사상 속에서 탐색해 보고자 한다.

Ⅱ.
불교의 진리는 한마디로 연기의 진리, 즉 연기법(緣起法)이라 할 수 있다. 연기법은 인과법 혹은 인연법이라고도 이름하는데, 초기경전에는 연기법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설해져 있다.

“연기법이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다. 다만 나는 이 연기법을 스스로 깨달은 이후에 (모든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연설하고 드러내 보일 뿐이다.”

붓다는 이러한 연기법을 깨달은 자이기에 붓다가 가르치는 진리는 결국 연기법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연기법은 불교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핵심적인 진리인 것이다. 연기법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인간이 겪는 괴로움[노사우비고뇌]은 운명적인 것이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떤 원인으로 말미암아 발생한다[연기]. 그 원인이란 곧 무명[진리에 대한 무지]과 탐욕이다. 따라서 무명과 탐욕을 제거하면 노사우비고뇌도 사라진다[연멸]. 이것은 초기불교 12연기설의 기본개념이다.
둘째, 삼라만상 일체만유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중중무진한 인과 관계, 다시 말해 상호의존성과 상의상관성에 의해 존재한다[법계연기]. 이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는 흔히 인타라망(因陀羅網)의 비유를 통해 설명된다. 인타라망이란 제석천에 있는 보배그물을 일컫는다. 이 그물의 모든 그물코에는 투명한 보석이 달려 있는데 그 모든 보석 하나하나에는 다른 모든 보석의 모습이 비친다. 뿐만 아니라 보석마다에 비친 모든 보석의 영상이 다시 모든 보석에 되비친다. 이러한 되비침은 끝없이 중중무진하게 계속된다. 이 비유는 화엄에서 말하는 이른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또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진리를 드러낸다.
이 가운데 특히 두 번째의 연기법은 오늘의 분열과 갈등 사회를 향하여 크나큰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할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나, 너는 너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각자의 나에 한없이 집착한다. 그러나 법계연기의 진리에 따르면, ‘너와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둘로 구분할 수가 없다. ‘너’ 속에 바로 ‘나’ 가 있고, 나 속에 너가 있기 때문이다. 달라이라마 존자는 종종 “나는 나 아닌 것으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한다. 나는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는 ‘경계없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기본적으로 나의 부모를 떠나 존재할 수가 없다. 부모 또한 조부모와 외조부모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그렇게 소급해 올라가다 보면, 나 속에는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조부모님, 그리고 무수한 조상님들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나 속에는 이웃과 사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나는 지수화풍의 인연들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나 속에는 내가 아니라 지수화풍이 있다. 이렇듯 너와 나는 모두 ‘경계없는 경계’들이다. 독립된 존재being가 아니라 끝없는 상호 관계에 의한 상호생성자interbecoming일 뿐이다. 이러한 인식과 깨달음 위에서 비로소 너와 나의 경계는 해체되고 관계는 회복된다. 오늘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 문제의 해결은 바로 ‘닫힌 나’가 아니라 ‘열린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Ⅲ.
이러한 ‘열린 나’의 실천은 다른 표현으로 하면 무아행(無我行)이라 할 수 있는바, 이것은 결국 모든 사람과 모든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자비로 귀결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불교 초기경전의 하나인 『숫따니빠따』에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만나게 된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아끼듯이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내라(149).”
“온 세계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를 행하라. 위 아래로 또는 옆으로 장애와 원한과 적의가 없는 자비를 행하라(150).”
“서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서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지라(151).”

어머니가 외아들을 아끼듯 모든 생명에 대해 자비를 행하라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그대로 대승불교에 계승되고 더욱 강화된다.
예컨대 『범망경(梵網經)』에서는 모든 중생이 다 부모로 간주된다. 그것은 곧 “모든 남자는 다 나의 아버지이고 모든 여자는 다 나의 어머니이니, 내가 태어날 적마다 그들을 의지하여 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도(六道)의 중생들이 다 나의 부모이니라.”라는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유마경』에서는 이른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사상이 발견된다. “내 병은 무명으로부터 애착이 일어나 생겼고, 일체중생이 앓으므로 나도 앓고 있습니다. 만약 중생의 병이 없어지면 나의 병도 곧 사라질 것입니다.”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나아가 『지장경』에서는 지장보살이 “제가 미래세가 다하도록 헤아릴 수 없는 겁에 저 6도의 죄고(罪苦) 중생을 위해서 널리 방편을 베풀어 다 해탈하게 한 후에라야, 제가 비로소 불도를 이루오리다.”라고 하면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지옥 중생이 모두 사라진 후에야 자신은 성불하겠노라고 굳게 서원한다.(박경준, 『불교사회경제사상』,2010)
이러한 지극한 사랑과 자비는 때로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형태와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붓다와 시하 장군 사이의 다음 일화에서 우리는 진정한 배려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자이나교도인 시하 장군이 붓다의 설법을 듣고 큰 감명을 받는다. 장군은 붓다에게 자신을 제자로 받아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붓다는 “시하 장군,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시오. 당신처럼 명망 있는 사람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장군은 놀랐다. 다른 종교 지도자였다면 깃발을 들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개종 사실을 선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깊은 존경심으로 뜻을 굽히지 않는 장군을 붓다는 조건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시하 장군,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이나교 교단에 보시하고 자이나교 수행승들에게도 예전과 똑같이 공양해야 하오.”
고타마 붓다 당시 인도 사회는 수많은 종교와 사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었고 종교 간의 갈등도 심했던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붓다는 불교 교단의 확장보다는 사회적 안정과 화합을 더 중요시하였고 그리하여 자이나교에 대한 배려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랫동안 어른에 대한 공경이라든가 이웃에 대한 배려의 아름다운 전통과 미풍양속이 있어왔다. 하지만 근래 특히 서울과 같은 거대한 익명사회에서는 갈수록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무례한 행동과 거친 말들이 횡행하고 있다. 포용적 공동체를 향한 소통과 화합은 작은 에티켓과 배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잊지 말아야 한다.

Ⅳ.
다음으로 필자는 포용적 공동체의 이론적 근거로서 불교의 공업(共業)사상에 주목하고자 한다.
불교의 업설은 개개인의 운명과 세계 변화의 제일 원인을 중생의 업(karma)으로 본다. 업설은 사람들 개개인의 다양하고 상이한 행위(업)가 각각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이른바 인과응보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응보 법칙은 종종 현실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착하게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어렵게 사는 반면, 게으르고 나쁜 짓만 하는 사람은 잘 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는 가르침이 이른바 삼세(三世)윤회설이다. 즉 착하게 사는 사람이 못사는 것은 과거생의 악업 때문이거나 혹은 미래생에 좋은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요,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잘 사는 것은 과거생의 선업 때문이거나 혹은 미래생에서 나쁜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과연 도덕적 인과법칙인 삼세윤회설로써 개인적인 운명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모든 현상이 과연 개인적인 선악의 행동과 필연적인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나타난 개념이 바로 공업(共業)이라는 개념이다. 『아비담심론경』에서는 ‘불공업(不共業)이란 중생 개개인의 업이 쌓여 이루어진 업이고, 공업이란 일체중생의 업이 쌓여 이루어진 업’이라고 공업을 정의하고 있다.
공업은 산스크리트어 Sadharana-Karma의 한역(漢譯)이다. ‘사다라나’의 사전적 의미는 ‘동일한 지주나 기초를 갖거나 의지하는’, ‘많은 또는 모든 사람에게 속하거나 적용되는’, ‘모두에게 공통되는’ 등이다. 한마디로 공업은 공동의 업이요 집단적인 업이라는 의미다. 공업에 상대되는 개념은 물론 ‘별업(別業)’또는 ‘불공업(不共業)’이다. 개별적인 업, 공통되지 않는 업이라는 의미이다. 불교 문헌에서는 일반적으로 불공업은 각각의 중생[중생세간]을 규정하고 공업은 자연환경 또는 세계[기세간]를 규정한다고 설한다. 이와 관련하여 대승 『열반경』에는 매우 흥미로운 가르침이 설해져 있다.

“일체중생이 현재에 四大와 時節과 土地와 人民들로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일체중생이 모두 과거의 本業만을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느니라.”

이 내용 속에는 업설에 대한 발상의 일대 전환이 나타나 있다. 사람들이 괴롭거나 안락한 것은 자신들이 과거에 지은 근본적인 업[本業] 때문만이 아니라, 사대, 시절, 토지, 인민의 원인들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원인은 모두 공업의 규정을 받는 기세간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즉 사대와 토지는 자연환경에, 시절과 인민은 (역사)사회환경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 『열반경』의 가르침은 개인의 안락과 행복은 개인적인 업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으며, 공동의 업과 노력이 보완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이 공업설의 진리는 결국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개별적인 노력뿐만 아니라 이상적인 공동체의 완성을 통해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분열과 갈등으로 공동체가 와해된 상황에서는 개개인의 행복은 불가능하다. 여기에 바로 포용적 공동체의 구현이 요청되는 소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업사상을 바탕으로 불교에서는 포용적 공동체 구현을 위한 구체적인 여섯 가지 실천덕목을 제시한다. 이른바 육화경(六和敬)이다. 육화경행이란,
 
첫째, 신화동주(身和同住)이다. 몸으로 부처님의 행을 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둘째, 구화무쟁(口和無諍)이다. 입으로 서로 다투지 않고 함께 찬영 등을 행하는 것이다.
셋째, 의화무위(意和無違)이다. 뜻에 서로 어긋남이 없이 부처님과 같은 생각을 하며 화합하는 것이다.
넷째, 견화동해(見和同解)이다. 올바른 견해를 통해 함께 이해하는 것이다.
다섯째, 계화동준(戒和同遵)이다. 올바른 행동을 함께 지켜 서로 화합하는 것이다.
여섯째, 이화동균(利和同均)이다. 이익은 모두가 균등하게 나눔으로써 화합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육화경은 출가수행자들이 같은 수행 공간에 머물면서 함께 행하는 실천덕목이지만 여러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행동지침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불교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과 절차를 매우 중시한다. 불교적 대중공사(大衆公事)의 전통은 만장일치 방식을 원칙으로 하지만 다수결의 원칙도 수용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원칙에 비추어 본다면 국가적인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서도 밀실행정이 아니라 공개적인 대화와 토론을 통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결론과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과정과 절차도 중요하다는 점을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기억해야 한다.

Ⅴ.
이상에서 포용적 공동체 구현을 위한 불교의 사상적 기본입장과 실천방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상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너와 나는 단절되고 독립된 실체being가 아니라 상호생성자interbecoming이다. ‘닫힌 나’에서 ‘열린 나’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 사람과 생명에 대한 끝없는 자비를 행해야 한다.
셋째,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항상 상대방과 이웃을 배려해야 한다.
넷째, 화합을 위한 공동의 행동규범을 함께 지켜야 한다.
다섯째, 의견 수렴을 위한 과정과 절차를 중시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 사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신중한 용어선택이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우리처럼 민족적 트라우마가 있는 경우는 ‘좌파’라든가 ‘우파’와 같은, 편가르기 지향의 표현들은 삼가는 것이 좋다. 진보와 보수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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